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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8월 9일 화요일

주희(朱熹)의 성즉리(性卽理)와 왕양명(王陽明)의 심즉리(心卽理)에 대한 비판적 분석




 왕양명(王陽明, 1472년 ~ 1528년)
주희와 왕양명은 각각 12세기와 15세기에 중국에서 태어났으며, 세계가 구성되는 원리에 대해서 궁금증을 던지고 그에 대해 나름의 해답을 제시하려 했던 신유학자들이다. 그들은 세상의 이치인 이(理)에 대해서 서로 다른 견해를 가졌으며 그들의 사상은 각각 성즉리(性卽理)와 심즉리(心卽理)로 구분된다. 주희는 이 세상의 태초의 원리인 태극의 개념을 가정하였는데, 태극이란 인간을 포함한 모든 사물들을 존재하도록 만드는 사유의 원리이며 그것들의 관계 맺을 수 있는 가능성을 나타낸다. 주희는 인간의 본성을 탐구하고 싶어 했는데, 인간이 가지는 본래의 마음을 관찰하는 것은 너무나 어렵기 때문에 그것보다는 지고한 원리인 태극으로부터 동일하게 분유한 이(理)를 간직하는 외부 대상인 사물[物]을 이해함으로써 궁극적으로 인간의 본성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주희는 안으로 향하여 스스로의 마음을 탐구하는 함양의 공부와 바깥을 향하여 외부의 사물을 공부하는 격물치지의 공부를 병행하여 이(理)를 이해하고자 했다.
왕양명은 이러한 주희의 공부 방법에 회의를 가졌다. 맹자의 진정한 계승자임을 자처한 왕양명은 인간의 본성을 개인의 마음 안에서 찾아야지 외부의 대상에서는 이것을 찾을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한 그에게 있어서 온 세상은 마음 안에 존재함으로 드러나는 것이기 때문에 바깥의 사물에 나아가서 이(理)를 배운다는 주희의 격물치지는 마음과 이치를 둘로 나누는 오류를 범하는 것이었다. 이(理)를 갈구하는 방식에 있어서의 견해차이로부터 왕양명은 주희의 관점을 비판하고 대신에 자신의 심즉리를 주장하게 되었다.
왕양명은 이(理)를 깨우치는 유일한 방법은 밖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오직 마음을 수양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는데, 왕양명의 제자들은 네 가지 교훈으로 구성되는 그러한 방법을 사구교(四句敎)라고 불렀다. 사구교에 따르면 최초 인간의 마음[心]은 선과 악이 존재하지 않는 단지 환히 열려있는 마음이다. 비어있는 상태였던 이 마음에 어떤 사물이 맺혔을 때 비로소 선도 있고 악도 있는 의(意)가 발생하며, 선한 행동과 악한 행동을 구분할 줄 아는 능력인 양지(良知)에 의해서 악한 행동을 배제하고 선한 행동을 실천할 수 있다. 왕양명의 사유에서 중요한 핵심을 차지하는 이러한 일련의 마음 속 과정인 사구교를 통해서 인간의 본성을 실현함으로써 심즉리가 완성된다.

군신, 부자, 현제, 부부, 붕우 관계는 모두 사람들이 없앨 수 없는 것이다. 그렇지만 배우는 사람은 반드시 격물하고 궁리해야만 한다. - 주희

 
심즉리는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마음을 갈고 닦으면 세상의 이치를 얻을 수 있다고 말하기 때문에 개인의 실천적인 측면에서 매우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하지만 예외적 상황에 대해서는 단지 우연적인 속성에 기댈 수밖에 없는 한계에 부딪힌다. 예를 들어, 선과 악을 구별하는 능력인 양지가 우리 모두에게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악행을 저지르는 사실에 대해서, 심즉리는 단지 그들의 본성이 잠시 가려졌기 때문이라고 밖에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을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가려진 본성을 깨우치게 할 수 있는 현실적인 도움을 주기 역시 어렵다.
왕수인의 사구교가 갖는 또 다른 치명적인 문제점은 마음을 움직이는 동력(動力)과 관련한 문제이다. 고요한 상태의 마음이 어떤 구체적인 사물로 향하면서 의(意)가 발생하는데, 그것은 의(意)가 반드시 어떤 사물에 대한 의(意)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이 때 우리의 마음이 구체적인 사물로 향하는 기본적인 경향성을 가진다는 가정은 사구교 이론을 위태롭게 만들 수 있다. 왜냐하면 왕수인이 “선도 없고 악도 없는 것이 마음의 본 모습이고, 선도 있고 악도 있는 것이 의(意)의 움직임이다.” 라고 말했는데, 마음이 어떤 대상을 지향한다는 단순한 가정은 의(意)에 선도 있고 악도 있다는 것을 암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의(意)는 땅에 떨어진 지갑을 향할 수도 있고 부모님의 어깨를 주무르려는 행동을 지향할 수도 있는데, 이 때 두 행동을 향한 마음의 경향성이 두 행동이 선하거나 악한 행동이라는 것을 결정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는 선과 악을 알고 그 중에서 선이라고 판단한 행동을 실천하는 능력인 양지가 있더라도, 그 행동에 대한 의(意)가 발생할 것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에, 양지의 기능을 단지 ‘일회성 실천’으로 만들 여지가 있다.

주희(朱熹, 1130 ~ 1200)

반면에 주희의 성즉리는 이와 같은 한계, 마음이 사물에 향하는 경향성의 문제를 갖지 않는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사물들이 단일한 원리인 태극에서 이(理)를 분유 받으며, 이 때의 이(理)는 곧 관계 맺을 가능성이다. 따라서 관계 맺을 가능성을 지니는 인간의 마음이 마찬가지로 관계 맺을 가능성을 지니는 상대방 사물에 다가간다고 해서 이해하지 못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 주희는 이를 “이 세계는 ‘만물들을 낳는 것’을 마음으로 삼고 있다. 그리고 사람과 사물들은 각각 이 ‘세계의 마음’을 얻어서 그것을 마음으로 삼고 있다”고 설명한다. 여기서 ‘세계의 마음’은 만물들 속에 존재하는 이(理), 곧 태극이고, 그것은 ‘만물들을 낳는 것’이므로, 없는 것에서 있는 것을 만드는 방향성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 방향성이 왕수인의 사구교에서 설명할 수 없었던 ‘마음의 사물을 향하는 경향성’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면 주희는 인간의 본성을 이해하기 위해서 왜 격물치지를 이야기 했을까? 주희에게 있어서 격물치지는 철저하게 스스로의 본성을 이해하기 위해서 취한 방법이었다. 주희는 그의 제자인 문진이 “사물 가운데 어느 것이 가장 절실한 것입니까?”라고 묻자, “군신, 부자, 현제, 부부, 붕우 관계는 모두 사람들이 없앨 수 없는 것이다. 그렇지만 배우는 사람은 반드시 격물하고 궁리해야만 한다.”라고 답하였다. 인간의 본성은 그가 속한 관계들에 의해서 규정된다. 나를 이해하기 위해서 본성 그 자체를 들여다보는 것은 쉽지 않지만 나를 둘러싼 관계들에 대해서 고민해 봄으로써 나를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비록 사물[物]에 나아가 그것들의 이(理)를 고민하지만, 이는 왕수인이 지적했듯이 사물 자체의 독립적인 이(理)를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규정하는 것으로써의 사물을 바라보는 것이므로 나의 본성과 사물의 이(理)가 일치하는 것[性卽理]으로 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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